노력형 길눈

길치에서 길눈 밝은 사람이 되기까지


갑자기 왜?


      • 영어 블로그에는 올렸었지만, 스마트폰이 고장 난 이후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니 아직까지는 굳이 스마트폰이 필요 없다고 판단, 전화랑 문자만 되는 폴더폰으로 생활을 한 지 어느덧 3개월째. 스마트폰이나 내비 없이 배달 봉사도 다니고, 멍때리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그냥 다른 길로 잘 찾아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내가 길치였다는 것.
      • 사실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얼마 전 싸이월드 사진첩과 다이어리 백업을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나를 길치라고 놀리고, 쇼핑몰 지도도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그런 내용의 다이어리를 보며 새록새록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요즘은 오히려 길을 잘 찾는다는 소리를 듣는 게 재밌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길치였던 이유


      •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특별히 심한 방향치/길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향 감각이나 길눈이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냥저냥 딱 보통인 정도.
      • 그런데 나는 주변 환경(사물이나 사람 등)에 신경을 정말 안 쓴다. 원래 성격이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지라, 길거리를 걸을 때 옆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고, 어떤 가게나 건물을 지나는지 일부러 의식하고 신경을 써서 보지 않는 이상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나의 가는 길을 온전히 그 사람에게 모두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친구와 걷다 보면 어느새 무한 직진을 하고 있는 우리를 종종 발견하곤 했다.
      • 내가 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차를 타서도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여름방학에, 한 달 넘게 도서실에서 봉사하느라 여느 때와 같이 엄마가 데려다주고 계셨는데, 문득 바깥 풍경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엄마에게 우리가 항상 이 길로 왔었냐고 여쭈었더니 엄마가 매우 어이없어하셨던 기억이 있다. 한 달 넘게 같은 길을 왔는데 모르냐고….
      • 이처럼 나는 그저 내가 가고 있는 길에 관해 관심이 없어서 길을 몰라왔다.
    •  

더 이상 길치이고 싶지 않았다


      • 무언가 내가 아주 못하는 게 있으면, 포기하고 인정하고, 그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좀 이상한 그런 게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요리를 매우 못하는데, 다들 내가 요리를 못하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내가 못하는 걸 누군가가 잘한다고 착각을 하면 괜히 조금 기분이 나쁘고, 정정해 주고 싶은 그런 게 있다. 뭐라고 깔끔하게 설명도 못 하겠고, 도대체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다.
      • 그런데 또 반대로, 내가 이걸 못한다고 보여지는 게 싫은 것들도 있다. 무언가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잘 못 하거나 많이 안 하는 것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종종 가지는 것 같다.
      • 길을 찾는 건, 처음에는 분명 전자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후자가 된 듯하다. 여자들 중 길치가 많다는 편견 떄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내 안에는 항상 편견을 깨고 싶어 하는 의식이 꿈틀거려서.. 분명히 고등학생 때에는 길치의 이미지를 나름 즐겼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내가 길치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길을 잘 찾으려고 엄청난 집중을 다하는 일이 잦아졌다. 길을 못 찾으면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도 들고.

운전의 시작


      •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대중교통이 아주 잘 돼 있지 않은 실리콘 밸리 지역으로 오게 되어서 급하게 운전 연습을 하고 면허를 땄다. 그런데 너무 내비게이션에 의존하게 되는 게 싫어서, 일부러 내비를 따로 사진 않았다. 대신 미리 구글맵으로 경로를 확인하고, 어느 길에서 어떤 턴을 해야 하고 등등 모든 디테일을 공부하고 외우고, 외울 양이 많을 경우 포스트잇에 간단하게 적어 가는 식으로 다녔다.
      • 처음에는 운전도 초보라 턴을 하기 위해서는 차선도 미리 바꿔놔야 해서, 어느 길이름이 보이면 차선을 슬슬 바꿔야 하는지도 외웠었다. 그리고 가끔 내가 외워둔 그 길 이름 팻말이 잘 보이지 않아 지나쳐버리고 길을 잘못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어딘가 멈춰서 지도를 확인하고 새 경로를 찾아서 다시 외워야 한다.
      • 그리고 나는 여전히 차에 내비가 없고, 여전히 길을 미리 외워서 다닌다. 가끔 사람들 많이 끌고 가는 장거리의 경우 조수석에서 봐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도 일단은 최대한 외울 수 있는 데까지 외우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예전처럼 어디서 차선을 바꾸고 등의 작은 디테일까지는 외울 필요가 없고, 고속도로 같은 경우는 그냥 고속도로 이름과 방향만 기억하면 돼서 훨씬 수월하다. 그리고 내비 없이 다니다 보니 이 동네는 어느 정도 지도 없이도 잘 다닐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잘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게 또 별생각 없이도 잘 찾아지는 게 아니라, 집중을 요한다. 길을 잃거나 잘못 들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열심히 지도를 그린다. 타고난 게 아니라 노력형이라는 거.

내 머릿속의 지도


      • 나는 길을 생각할 때 지도로 생각을 한다. 내가 가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지도 말고, 항상 위쪽은 북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인 static 지도. 그래서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면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서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을 생각한다.

내비게이션을 안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 이건 그냥 사족인데, 원래는 내비에 의존하고 싶지 않고 길을 잘 찾고 싶어서 내비를 안 썼는데, 가끔 경로를 미리 알아볼 시간이 없을 때 네비를 써보면, 내가 내비를 안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구나 싶다. 일단 나는 위에 언급했듯이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서 생각하는데, 전체 지도의 큰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내비로 작은 화면으로 보이고, 이 바로 다음에 취해야 할 액션만 나오는 게 매우 답답하다. 그래서 내비를 이용하더라도 큰 그림을 보고 내가 어떤 고속도로들을 타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 내비가 별로인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사실 남의 말을 진짜 안 들어 먹는다. 예를 들면 내가 스스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공부 좀 하라고 한다면 하기 싫어져서 안 한다. 그리고 뭔가 남이 말로 해주는 것보다 그냥 내가 직접 겪고 부딪혀야 와닿고 깨닫게 되는 그런 게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매우 자기중심적이라 누가 뭐라 하든 나는 그냥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미 가야하는 길을 대충 미리 봐서 알고 있는데, 내비에서 이래라저래라하면 괜히 싫다 ㅋㅋ. 저 길에서 우회전해야 하는 걸 나도 알고 있는데, 이미 아는 걸 내비가 얘기해주면 왠지 내비가 말해줘서 따르는 듯한 기분. 아, 쓰고 보니 진짜 성격 이상하긴 한데, 뭐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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